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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섬 흑산

                                      - 신안 흑산도

 

 

흑산도 밤 거리

홍도에서 유숙을 포기하고 흑산으로 건너 왔다. 가난한 나그네는 그 섬의 비싼 물가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홍도에서 승선한 여객들 대다수가 흑산도에 내리지만 흑산도는 한적하다. 섬의 면적이 큰 탓에 관광객들은 이내 흑산 땅에 흡수되고 만다. 섬은 여객선 터미널 입구부터 홍어, 전복을 비롯한 수산물 판매점과 횟집, 건어물 노점 등 관광 어촌의 면목이 여실하다.

 

저녁이 되자 뱃놀이를 떠났던 유람객들 서둘러 포구로 돌아온다. 비가 오시려는가. 빗방울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진다. 흑산항 밤거리를 걷는다. 흑산에는 크고 작은 마을이 여럿이지만 상가와 여관, 민박 등은 주로 예리마을에 몰려 있다. 해가 넘어가자 더위는 한풀 꺾이고 바람이 서늘하다. 마을 노인들도 바닷가 평상에 나와 앉아 두런거린다. “외국인” 하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길 가던 마을 소녀다. 소녀는 “아닌가?” 중얼 거리며 황급히 뛰어 간다. 무안했던 모양이다. 시커멓게 탄 피부와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나그네는 자주 외국사람 대접을 받는다.

 

관광객들은 횟집 야외 탁자에 앉아 대부분 삭힌 홍어나 전복회를 먹는다. 흑산 앞바다에서 대량 양식하는 전복은 흑산의 새로운 특산물이다. 횟집마다 홍어와 전복, 우럭 외에는 이렇다 할 수산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과거에는 주낙으로 홍어를 잡았지만 요즈음 흑산의 홍어 잡이는 걸 낚시다. 이 또한 주낙의 일종이지만 미끼를 끼우지 않는 공갈낚시라는 점이 차이다. 수많은 낚시 바늘이 촘촘히 매달린 주낙 줄을 홍어가 다니는 길목에 길게 깔아놓고 거기에 걸리는 홍어들을 잡아 올린다. 일종의 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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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촌 마을

자산 문화 도서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서면 흑산면 보건지소 앞에서 길은 두 갈래 길이다. 왼쪽 길을 따라 걷는다. 영산도가 보이는 해안 길. 축항리에서부터 오르막이 시작된다. 8월, 한참 휴가철이지만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는 드물다. 거리가 멀어 관광객들이 차를 가지고 들어 올 수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도로에는 새 한 마리가 자동차에 깔려 죽어 있다. 과속은 뭍이나 섬 할 것 없이 전국적인 운전 습관인 듯하다.

 

자동차 전용도로가 아닌 일반 도로, 더구나 인도나 갓길도 없는 지방도로는 자동차만 다니는 길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다니고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경운기와 트랙터와 개와 고양이와 온갖 동물들이 함께 다닌다. 하지만 운전자들은 도로를 전세 내기라도 한 것처럼 도로에 자기 차 한대 밖에 없는 것처럼 한껏 속력을 낸다. 공중을 나는 새나 재빠른 개와 고양이들까지 차에 깔리는 상황이니 노인이나 어린이들은 어쩌겠는가. 삶을 실어 나르는 도로가 저승으로 가는 통로여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한 고개를 넘으면 또한 고개, 흑산의 고갯길은 구비 구비 첩첩 산길이다. 창촌 마을의 폐가를 기웃거리는데 노인 한분이 다가와 말을 건다.

“옛날에는 집들이 살았는데 다들 나가빌고 쪼금만 살고 있소.”

 

마을은 멸치잡이에 생업을 의존 한다. 마른 멸치와 멸치액젓. 멸치는 주로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잡는다. 봄 어장은 짧다. 5월 한 달 뿐. 여름에는 자연산 미역을 채취해서 말린다. 멸치 철이면 선주들은 육지의 직업소개소에서 선원들을 구해다 어장을 한다.

“옛날에는 일 년 내내 멸치잡이 했는데 이제는 잘 안 잡혀요. 수온이 높아져서 그런지. 해파리 새끼가 많이 들어가서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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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의 홍어가 유명하지만 예리항을 제외한 흑산도 대부분의 마을은 홍어잡이와 무관 하다.

“배가 30톤 이상은 돼야 홍에 잡이를 할 수 있어. 돈이 몇 억 들어요.”

가까운 바다에 홍어가 사라지니 홍어 배들은 먼 바다로 나가 조업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 큰 배가 필요해진 홍어 잡이는 자본이 많은 일부 선주들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도 노인은 홍어 이야기가 나오자 흥이 오른다. 옛날 흑산도 앞바다에서 목선으로 잡을 때는 홍어가 지금보다 몇 곱절은 컸었다.

“홍어는 잡으면 배에서 바로 숙성을 시켰어요. 육지로 나가면 구더기가 날 정도로 썩었었지.”

뭍의 사람들은 홍어 하면 그 톡 쏘는 삭힌 맛을 떠올리지만 실상 흑산도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기지 않는다. 홍차처럼 삭힌 홍어는 먼 바다 뱃길이 만들어낸 문화다. 흑산 홍어배의 종점이었던 나주 영산포가 삭힌 홍어의 본고장인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삭혀서는 잘 안 먹어요. 바로 싱싱한 놈, 그렇게 먹어야 더 맛있고.”

 

태생이 섬사람인 나그네 또한 삭힌 것보다는 싱싱한 홍어가 더 좋다. 홍어 애탕도 마찬가지다. 도시에서 삭힌 홍어 애탕을 먹어본 사람들은 실망이 크다. 하지만 생 홍어의 간과 내장으로 끓인 홍어 애탕은 고소하고 달다. 흑산도 사람들에게는 홍어가 음식인 동시에 약이기도 했다.

“옛 어른들은 홍어가 소화제라 했어요. 껍데기에 낀 미끌미끌한 꼽을 삭힌 뒤 먹으면 소화도 잘 되고 가래도 잘 삭는다 했지.”

 

팔순의 할머니 한분은 지팡이에 의지해 마실을 나오셨다.

“아이스크림 사묵을라고 기다렸는데 안 오네.”

노인은 농협 차량을 기다리신다. 농협하나로 마트의 식품 차량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들을 순회하며 이동 판매를 한다. 이동이 수월치 않은 노인들을 위해서다. 200여명이 살던 마을에 지금은 18명의 노인들만 산다. 마을에는 구멍가게도 하나 없으니 노인은 5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먹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린다.

몇 개의 고개를 넘었더니 온몸이 땀범벅이다. 하지만 더 이상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더위에 숙달이 된 것일까. 실상 더위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위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 지독한 더위를 무릅쓰고 땀범벅이 되어 걷다보니 이제는 더위에도 아주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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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미

사리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거북 겹 바위가 있다. 거북제를 지내던 신성한 바위다. 거북은 바다 쪽을 보고 있다. 신석(神石). 오랜 옛날 만삭의 바다거북이 표류중인 어부를 등에 업고 이 마을로 와서 목숨을 살렸다. 거북은 세 마리의 새끼를 순산 했으나 산후통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주민들은 거북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거북제를 지냈다. 신이 된 거북은 마을의 안녕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 왔다. 이 돌 거북은 대주가다. 막걸리를 6말 5되 5홉을 마셔야 취기를 느끼며 가볍게 움직인다. 그때부터 거북이 영험을 나타낸다고 주민들은 믿어왔다.

 

고갯마루에서 모래미 마을(사리)로 넘어가는 길가는 상록 활엽수인 잣밤나무 군락이 잘 보존되어 있다. 다도해의 섬들에서도 이제는 상록 활엽수 군락을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저 상록수 군락은 무엇보다 소중한 섬의 자산이다. 사리는 자산 정약전이 유배 생활을 하며 자산 어보를 저술했던 마을이다. 1801년(순조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면서 자산은 그의 아우 다산 정약용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다. 다산은 강진으로 가고 자산은 우이도를 거처 흑산도까지 왔다. 1816년 자산은 흑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16년 형극의 세월 동안 자산은 흑산도와 흑산진의 위수지역인 우이도만을 오갔을 뿐 끝내 뭍을 밟아보지 못했다. 그 세월 자산은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고, 흑산 바다의 어류연구에 매진해 자산어보를 남겼다.

 

자산이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 복성재다. 새로 복원된 복성재 마루에 앉으니 사리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당시에도 이 섬에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에게 흑산도는 태어나 태를 묻고 평생을 살아가야할 세계의 전부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어떤 이에게는 감옥이기도 하다. 유형이 아니었더라면 존재조차도 몰랐을 세계에서 자산은 살다 갔다. 그가 새로운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자산은 새로운 학문 세계를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은 결코 자산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가 몸을 의탁했던 흑산 섬사람들과 함께 이룬 업적이다.

 

사리마을 입구에는 “손암 정약전 선생께서 통한의 세월을 꿈으로 승화시켰던 마을”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읽힌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보다 뭍에서 온 유배객만을 추앙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손암 또한 자산 어보에서 마을의 ‘창대’라는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저술이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자산 어보는 손암 개인의 연구가 아니라 창대와 손암의 공동 연구 성과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마을은 또한 손암의 유배지로만 기억 될 것이 아니라 창대의 마을로도 기억 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사람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긴 다음에야 비로소 타인의 존중을 받는다 했다. 흑산 사람들에게 창대는 어제의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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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기프미 마을

심리 마을 당산 나무 아래 동네 노인들이 둘러 앉아 술을 자신다. 마을은 언덕에 있고 당산 나무는 주민들의 쉼터다. 사랑하는 후배 이 주빈의 고향마을이라 더욱 정겹다. 그도 어릴 적 저 당산 나무 그늘에서 많이 놀았을 것이다.

“여가 무지 시원한 곳인데, 웬만하면 바람이 있는데 오늘은 바람이 없네.”

 

노인은 나그네를 불러 소주 한잔을 권한다. 갈증이 심해 술보다는 마실 물이 급하지만 물은 없다. 종이컵 가득 따라 주는 소주를 마시니 술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노인들은 평상에 둘러 앉아 찐 생선을 먹는다. 상어와 우럭, 삼치 등의 물고기와 떡과 술. 잔치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 마을에서는 아직도 어느 집에 제사가 있으면 당산 나무 아래로 음식을 가져와 마을 사람들과 나눈다. 할머니 한 분이 상어 고기 한 토막을 건네주신다.

“상여 괴기도 있고 제사를 크게 지냈구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제사 음식 안묵는다믄서.”

“영감들은 꼬리만 주는구만 간데 토막을 줘야지.”

 

마을 앞바다에서는 휴가차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배를 몰며 그물을 끌고 있다. 횟감이라도 잡을 요량이지만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노인들은 뭍에 앉아서도 바닷속 사정이 훤하다.

“옛날에는 요 앞 바다에서도 조기랑 갈치도 많이 낚으고 그랬제. 요새는 없어요. 서대, 장대나 멫 마리 걸리면 다행이제. 미역 양식 한다고 바다 길을 막아 놓으니까 괴기가 못 들어 와요. 그라제, 사람이나 괴기나 길을 막으면 못 다니제.”

하지만 어쩌랴 마을은 고기잡이보다는 해조류 양식에 기대고 산지 오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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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부는 소년

옛날 어느 해 옹기장수의 배가 흑산도에 입항했다. 옹기 배에는 네 사람의 선원과 얼굴 고운 소년 하나가 타고 있었다. 옹기 배는 진리 처녀당 아래 부둣가에 정박했다. 선원들이 옹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가자 소년은 당 앞 소나무에 올라 앉아 피리를 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소년의 피리 소리에 홀린 듯 넋을 잃었다. 진리 처녀 당에 거처하는 처녀 당신도 소년의 피리 소리에 매혹 당하고 말았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옹기를 다 판 선원들이 출항하기 위해 돛을 올리자 잔잔하던 바다에 파도가 거세지고 역풍이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었다. 선원들이 배에서 내리자 바다는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기를 여러 날 반복했다. 선원들은 이유를 알기 위해 마을의 무녀를 찾았다. 무녀는 진리 처녀당의 당신이 소년의 피리에 홀려서 배를 못 뜨게 한다고 알려주었다. 선원들은 소년을 섬에 남겨두고 가기로 작당했다. 거짓 심부름으로 소년이 배에서 내리자 선원들은 급히 배를 돌려 떠나버렸다. 소년은 슬픔과 외로움에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처녀 당 앞 소나무에 올라가 피리만 불었다. 그러다 소년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소년은 그 자리에 묻히고 처녀 당신 옆에는 소년의 화상이 봉안 되었다. 그곳이 바로 저 진리 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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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해양도시와 옥섬

우리가 기억하는 흑산도의 이미지는 홍어, 파시,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쓴 섬 정도다. 하지만 흑산도는 동아시아의 해상교류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섬이다. 흑산도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동아시아 횡단 항로의 중간 기착지이자 해상교역의 중간 거점이었다. 진리 읍동에는 사신이나 항해자들의 숙소와 편의시설로 활용되던 관사터가 남아 있다. 상선의 선원이나 사신 등 항해자들이 제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던 제단이나 절터도 있다. 상라봉에는 제단이 그 아래는 무심사 선원 터가 있다.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소에서는 1999년부터 1년 동안 진리 읍동마을과 상라산성 일대의 조사를 통해 관사터와 절 터, 철마와 주름무늬병, 무심사선원 이라 새겨진 기와 등 다수의 유물, 유적을 발굴했다. 거문도에서 한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출토된 것처럼 고 중세 동아시아의 해상교류사를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물들이다. 발굴 조사로 고대부터 흑산도 읍동 마을에 해양도시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져왔다. 해양 왕국 고려의 멸망 이후 조선이 명나라를 추종하면서 해양 국가를 포기하고 해금정책을 썼던 까닭이다. 조선의 폐쇄성은 해양 정책의 폐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진리 해안 길을 따라 걷는다. 읍동 앞 바다에는 작은 무인도 하나가 있다. 옥섬(獄島). 과거 흑산도 관아에서 죄수들을 수용하던 감옥 섬. 마피아 대부 알카포네를 가두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 섬과 같은 옥섬이다. 절벽이 둘러싼 옥섬은 쉽게 탈출할 수 없는 구조다. 섬에는 별다른 건물도 없이 죄수들이 비바람을 피해 지낼 수 있는 동굴만 하나 덜렁 있었다. 죄수들은 짐승처럼 섬에 가두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몇 달씩 식량 공급을 하지 않아도 죄수들은 낚시를 하거나 해초를 뜯어 먹고 생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아무 흔적 없는 무인도에 불과하지만 저 섬 또한 잊혀져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 유적이다.

 

하루를 꼬박 걸어서 흑산 섬을 일주했다. 오르막과 내리막 길을 수십 번은 족히 오르락 내리락 했다. 단 기간에 이토록 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험해 보기는 처음이다. 이 섬은 마치 생의 압축판 같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걸은 끝에 결국 도착한 곳은 처음 그 자리, 예리 마을이다. 그 곳은 또한 섬에서 가장 낮은 자리다. 사람이 높은 곳에 있다가 아무리 낮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해도 처음 그곳이 아닌가. 사람은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잃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흑산, 참으로 위로가 많은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