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8003548.jpg  

경북 청도, 운문사의 밤은 짧았습니다. 도량석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새벽 세시도 못 됐을 것입니다. 꿈결인 듯 들려오는 목탁 소리. 사람도, 나무도, 풀도, 길짐승도, 날짐승도, 풀벌레도 일어나라,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 부처님께 새벽 예불 드리러 가자. 놀라지 말고 서서히 잠 깨어라. 목탁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집니다. 커졌다 작아지고, 다시 서서히 커지는 목탁소리. 깨어나라, 깨어나라, 미혹에서 깨어나라. 나는 눈도 못 뜨고 귀만 깨어 목탁 소리를 듣습니다. 소리가 점점 아득해져 갑니다. 끝끝내 미혹에서 깨어나지 못한 중생은 도량석 소리를 자장가 삼아 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듭니다.

 

호거산(虎踞山) 이목소(璃目沼) 계곡 바로 옆 요사채, 계향실에서의 잠은 달기만 합니다. 소용돌이치는 용소(龍沼). 깊이를 알 수 없던 이목소가 바닥을 드러낸 것은 계곡의 제방 공사가 끝난 뒤부터 였다합니다. 지금은 무서운 소(沼)가 아니라 계곡의 작은 물웅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더 이상 용이 사는 소는 없으나 사람들이 이름까지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신라 말 보양선사의 운문사 중건을 도운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은 어디로 떠나가 버린 것일까. 용들이 살 수 없는 세계는 더 이상 신비롭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용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삼국유사에는 보양선사와 이목의 전설이 채록 되어 있습니다. 보양 선사가 중국에서 불법을 수학하고 신라로 돌아갈 때 서해 용왕이 그를 궁중으로 맞이했습니다. 용왕은 불경을 염송하고 금라가사(金羅袈裟) 한 벌을 보시 한 뒤 그의 아들 이목으로 하여금 선사를 따라가 시봉 하게 했다지요. 그렇게 이목은 보양 선사를 모시고 운문사 계곡 못에 살며 보양 선사의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에 큰 가뭄이 들어 모든 밭의 작물들이 말라 죽어갔습니다. 보양선사가 이목에게 부탁하여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그렇게 가뭄이 극복 됐습니다.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 앞에 와서 선사에게 하늘의 법도를 어긴 이목을 내 놓으라 요구했다지요. 보양선사가 뜰 앞의 배나무(梨木)를 지목하자 사자는 그 나무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참 어수룩한 사자였던가 보군요.

 

S8003541.jpg  

전설은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암호문입니다. 대체로 용은 왕이나 세력가를 상징 합니다. 신라 말 혼란기에 서해의 용은 지방 호족이었을 겁니다. 청도 주구 산성에서 보양선사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저항세력을 토벌하도록 계책을 일러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보양 선사가 구체제에 반대하는 신흥 세력들, 호족들과 연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지요. 지방 호족의 아들 이목은 보양선사를 따라와 운문사 근처에 살면서 선사를 도왔을 것입니다. 가뭄이 들자 이목은 운문천의 상류를 막아 물을 가두었고 그 물로 운문사 일대의 농사를 살렸을 것입니다. 이에 물길이 끊긴 운문천 하류에 사는 사람들이 관청에 고발해 관리가 이목을 잡으러 왔으나 보양 선사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 했을 것입니다. 전설이라 해서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닙니다. 전설이나 설화의 서사 행간에는 현실 삶의 기록이 숨어 있습니다. 이목의 전설도 당시의 현실을 반영 한 것이겠지요.

 

창이 밝아 눈을 뜹니다. 나를 깨우는 것은 늘 소리가 아니라 빛입니다. 시간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주머니를 뒤져도 시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시계를 잃어버린 것일까. 실상사 연관 스님에게 얻어 찬 손목시계를 한 동안 잘 지니고 다녔습니다. 여섯시의 아침 공양은 끝났을 것입니다. 운문사의 식단은 정갈합니다. 운문승가대학 사집반(2학년) 학인 스님들이 직접 농사지은 국거리로 국을 끓이고, 배추와 무로 김치 담고, 온갖 채소로 반찬을 만듭니다. 학인 스님들이 가마솥에 밥을 짓습니다. 여느 절집처럼 마늘과 파·부추·달래·흥거 등의 오신채와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운문사의 음식은 언제 먹어도 감칠맛이 납니다. 그 천연의 정갈함이 뱃속을 편안히 다스려 줍니다. 자주 구름문에 들었으나 내가 운문사에서 아침 공양 시간을 맞춘 것은 딱 한 번뿐이었습니다. 운문사의 밥이 절밥 중에서도 상등으로 맛나지만 오전불식의 게으른 유랑자는 밥 시간 놓친 것이 아쉽지 않습니다.

 

지금의 운문사는 비구니 절입니다. 운문사에서 개설한 운문승가대학에서는 260여명의 학인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중입니다. 가람은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 자락에 위치해 있습니다. 운문사 뒷산에는 호거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거기서 산의 이름이 유래 됐습니다. 일반적으로 산 밑에 자리한 절들은 산을 등지고 건물을 앉히는데 운문사는 반대로 산을 마주보고 건물들이 자리해 있습니다. 풍수지리에 따라 호거산을 마주 대할 때 생길 수 있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건물을 돌아 앉혔다고 전해집니다. 풍수지리설이야 어떻든 가파른 절벽을 보는 것 보다는 푸른 숲을 보는 것이 마음 맑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S8003539.jpg  

운문사 주변에는 호거대뿐만 아니라 호랑이 관련 지명이나 전설이 많습니다. 운문면 순지리 범골에 전해지는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호랑이와 관련된 전설과 지명들이 많은 것은 운문사 일원이 워낙에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호환(虎患)을 많이 당했던 까닭일 것입니다. 호거산 산정에는 둘레가 300m 남짓한 작은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전설에는 신라 경애왕 4년(927년) 후백제의 견훤 왕이 신라를 침공할 때 기지가 된 산성이라고 합니다. 운문산성 혹은 호거산성, 지룡산성이라고도 부르지요.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한 신승에 의해 창건 되었다고 전해지며, 진평왕 30년(608년) 원광국사에 의해 1차 중창되었습니다. 원광국사, 보양 선사, 원응국사 학일, 보각국사 일연 스님 등 신라와 고려의 고승들이 주석했었지요. 신라의 원광국사가 좌우명을 묻는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 5계를 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원광 국사는 진평왕 34년에 왕명을 받고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정벌해 주기를 애원하는 ‘걸사표’를 지어 바쳤습니다. 왕명을 받으며 원광국사는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의 할 짓이 아니나 어찌 감히 명령을 쫓지 않으리까?” 했다합니다. 이는 당시 불교가 철저히 왕실에 예속된 통치 이데올로기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부처님 법보다 왕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원광 국사의 고뇌가 묻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걸사표의 내용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전쟁을 했고 통일신라시대를 열었다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증명하는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걸사표에 따르면 신라는 고구려를 동족이 아니라 ‘남’이라 여겼습니다. 신라가 수나라나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원대한 삼국 통일’ 따위가 목적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땅 일부라도 차지하려는 영토욕 때문이었습니다. 한반도에 삼국통일은 없었습니다. 먹고 먹히는 침략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삼국 통일은 허구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 종족인 석가족을 멸하러 오는 코살라국의 비두다바 왕을 막아서며 두 번씩이나 전쟁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불제자인 원광국사는 임전무퇴를 가르치며 ‘남’들인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을 독려하기 까지 했습니다. 원광 국사 또한 부처님 법과 왕의 힘 사이에서 고뇌하긴 했으나 그는 기꺼이 왕에게 굴복했습니다.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정복해달라고 간청하는 걸사표를 쓰고, 임전무퇴로 전쟁을 ‘고무찬양’했으니 그를 어찌 진정한 불제자라 할 수 있을까요. 권력자에게 부역하는 종교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듯합니다.

 

원광국사에서 시작된 운문사와 국가 권력 유착의 전통은 신라 시대를 지나 고려까지도 이어집니다. 그 보답으로 12세기 초 운문사에 주석하던 원응 국사 학일은 고려 숙종으로부터 논 200결과 국노비 500인을 하사 받습니다. 운문사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절들이 그랬지만 절이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가 되고 노예까지 두고 부린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무소유와 모든 존재의 평등을 설파한 부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가 아닌지요. 당시 시대의 한계를 탓하기에는 이후 사찰이 보인 탐욕과 수탈의 만행이 너무 컸습니다. 그 시대 사찰은 불교가 아니라 불교의 타락입니다. 운문사가 오랜 세월 지주로 군림 한 것은 이후 운문면 일대 농민들의 저항을 불러와 한때 운문사를 폐사 지경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S8003540.jpg  

고려시대 항몽 전쟁 시기 운문사에서는 일연선사가 주지로 추대 된 뒤 머무르며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집필을 통해 자주의식을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항몽의 염원을 담은 대장경 간행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랜 세월 비구 절이었던 운문사가 비구니 절이 되고, 비구니 전문 교육 기관이 된 것은 195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1105년(고려 숙종10년), 원응국사에 의해 건립된 뒤 수차에 걸쳐 중창된 보물 835호, 운문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입니다. 대웅보전은 반야용선(般若龍船)입니다. 이 자비스런 배가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다 줍니다.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떠나려는 배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악착보살'이 있습니다. 지금은 공사 중이라 문이 잠겨 볼 수가 없지만 기필코 깨닫고야 말겠다는 악착같은 보살의 마음이 남의 마음 같지 않습니다.

 

S8003544.jpg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도 있다. 네가 있음으로 인하여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너도 있다. 삶과 죽음 또한 연기의 관계에 있다. 삶이 있음으로 죽음이 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오늘의 나 또한 내일의 나는 아니다. 한 순간도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머물러 있는 실체가 없으니 삶 또한 실체가 없다. 삶이 없으니 어찌 죽음이 있겠는가. 죽음에 대한 고민은 허구의 고민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불가의 가르침은 논리와 체계가 있으나 여전히 존재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죽음이 없다는 뜻을 알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고민이 허구적이라는 뜻 또한 잘 알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죽음에 대해 알 수 없으니 실체가 없는 죽음을 고민하지 말고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 하라는 말씀일 터. 설령 죽음이 있다 한들 죽음이야 죽은 자의 것이지 산자의 몫은 아닌 법!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통이 가시지 않습니다. 대체 삶은 어쩔 셈인가? 죽음이 있든 없든 소멸되지 않는 이 삶의 고통은 어쩔 것인가? 늘 그렇듯이 존재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삶만이 유일한 문제인 것을.

 

공양간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사리암에 오릅니다. 사리굴 입구와 관음전까지 기도객들로 꽉 들어 차 있습니다. 오랜 옛날 사리굴에서는 쌀이 나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살면 한 사람분의 쌀이 나오고, 두 사람이 살면 두 사람분의 쌀이 나왔는데 어느 날 공양주가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어 구멍을 넓히고부터는 쌀이 나오지 않고 물이 나오게 됐다합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전설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필요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은 죄악이란 가르침이 아닐까요. 필요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필요한 물질마저 잃게 했으니 죄악인 것이 확실합니다. 사리굴은 무소유의 청빈한 삶을 살 것을 독려하는 살아있는 전설의 샘입니다. 다들 나반존자를 주문하며 절을 합니다. 도량은 간절함으로 가득합니다. 사리암의 주된 신앙 대상은 나한입니다.

 

SSL11413.jpg  

나반존자. 관음전 안의 사람들마저도 관음보살이 아니라 관음전 밖의 나반존자를 향해 절을 올립니다. 나반존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운 분으로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항상 천태 산상에서 홀로 선정을 닦았다고 전합니다. 사리굴 천태전에 나반존자 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나도 기도객들 틈에 끼어 108배를 올립니다. 참배객들은 기도의 반응에 대해 추호도 의심이 없어 보입니다. 대체로 기도객들이란 질병의 치유가 아니면 자신이나 가족의 이기적 욕망을 들어 달라고 기원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기도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나는 다만 저 기도객들의 흔들림 없는 믿음이 부러울 따름이지요. 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믿음, 깊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이미 큰 복을 얻었습니다.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도 가만히 주문을 외워 봅니다. 내 본래 성품이 부처라면 나반존자는 나의 법신 비로자나불인가. 그렇다면 나반존자에게 기도한 것은 곧 나 자신에게 기도한 것이겠지요. 오를 때 가늘던 빗방울이 굵어집니다. 이제 내려갈 때가 온것입니다.